영춘권의 창시자인 오매선사와 제자 엄영춘은 둘 다 자그마한 체구의 여성들이었다 영춘권 이론의 핵심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 여성에 의해 최초로 만들어졌다는 그 기원 속에 답이 들어 있다. 평균적인 여성이 평균적인 남성을 단순히 힘과 스피드로 제압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물리력의 상대적 열세라는 객관적 조건은 바로 힘과 속도의 끊임없는 추구가 영춘권의 본질과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영춘권은 그 고유의 여성적인 철학을 통해 상대의 에너지를 깊이 있고 통찰력 있게 이용하며, 그 에너지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항상 흐르게 하는 무술이다. 영춘권의 이론은 바로 이러한 기본 전제에서 시작된다.
1. 중심선中心線 (Center Line)
일반적으로 중심선은 눈, 코, 목, 명치, 사타구니를 포함한 인체의 전면 중앙을 이은 가상의 직선이며 경락에서는 임맥任脈을 포함한다. 중심선은 상대와 나와의 서로 가장 짧은 직선거리일 뿐만 아니라 신체 부위의 가장 위험한 급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인체의 중요한 타격점은 대부분 이 선상에 위치해 있다. 영춘권의 전투이론에서 핵심적인 사항이 바로 중심선의 장악에 관한 것이다. 격투를 상대와 나의 공격/방어가 이루어내는 일련의 관계라고 할 때, 영춘권에서는 그 핵심을 상대의 중심선과 내 중심선의 관계로 수렴하여 파악한다.
2. 팔꿈치와 무릎을 안쪽으로 (Elbow-in, Knee-in)
팔꿈치의 위치에 관한 문제는 대부분의 내가권內家拳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원칙이다. 태극권에서는 ‘추주墜肘’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팔꿈치를 떨어뜨릴 것을 요구한다. 무릎을 안쪽으로 모아주는 자세는 팔꿈치를 모으는 자세와 더불어 수련자의 에너지를 상대방을 향해 집중하도록 기능한다. 영춘권의 모든 자세stance에서 수련자는 무릎이 안쪽으로 조여지는 느낌을 인지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팔꿈치와 무릎에 관한 요구사항은 최소한의 동작과 힘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기 위한 영춘권의 신체역학적인 원칙이다.
3. 몸의 중심을 뒤에 (Weight Backwards)
다른 무술 종류와 다른 영춘권의 고유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중심을 몸 뒤에 두는 것이다. 몸의 중심이 뒤에 놓여 있는 자세는 받아들이고 흘림과 동시에 유효하게 타격할 수 있는 신체적 기틀을 마련한다. 또한 후면 중심의 신체 상태는 전면으로 향하는 에너지와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균형추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수련자가 전체적인 에너지의 조화, 신체적인 자기완결을 이룰 수 있게 만든다.
4. 촌경寸勁 (Inch & Whip Power)
촌경은 충권沖拳straight punch과 팡귄whip punch 등의 물리적인 수단에 의해서 전달된다. 상대와 나 사이의 가장 짧은 직선거리를 타격하는 충권과 더불어 상대의 팔 혹은 나의 다른 팔이, 타격하는 팔에 장애물로 놓여있을 때 회초리와 같은 회전력을 실어 타격하는 팡귄은 영춘권의 가장 특징적이고 효율적인 타격방식이다. 촌경은 단전을 중심으로 신체 각 부분(손목, 팔꿈치, 어깨, 허리, 엉덩이, 무릎, 발목)의 협응성에 의해 확보된다. 이것은 결국 타격하는 그 지점에 매 순간 나의 온몸이 온전하게 실리는 방법을 찾아나가는 것이다.
5. 사문四門 방어 (Four Gates)
위로는 눈썹을 지나고 아래로는 사타구니를 지나는 지점을 상하 양변으로 하고, 양쪽 어깨 너비를 좌우 양변으로 하는 직사각형의 공간을 수직의 중심선center line과 명치를 지나는 가상의 수평선으로 분할하면 사분면四分面이 생긴다. 이렇게 나뉜 몸통의 네 부분을 ‘사문四門 (Four Gates)’이라 칭한다.사문방어는 팔꿈치 중심과 중심선 원리를 바탕으로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상대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영춘권의 방어 원리이다.
6. 예민성 (Sticky Sensitivity)
‘팔은 눈보다 빠르다.’ 이것이 영춘권을 익히는 가장 중요한 기본 전제이다. 상대와 얽혀있는 나의 팔은 상대를 감지하는 안테나와 같다. 움직임은 눈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팔로 ‘감지’한다. 감지하기 위해 나의 팔은 상대의 팔에 끈끈하게sticky 달라붙어야(점착) 한다. 상대에게 올바로 점착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눈보다 빠른 감각의 예민함과 움직임이 발생하는 것이다.
7. 동시성 (Simultaneity)
영춘권의 공격은 항상 방어와 동시에 이루어진다. 공격과 방어는 다양한 상황에서 좌우, 상하, 전후의 방향으로 동시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이때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공격/방어의 상반된 에너지는 서로가 서로를 보조하고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공격/방어의 적절한 에너지 분배를 통해 적절한 밸런스의 유지와 신속한 공격/방어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된다.
8. 음陰/양陽 (Yin & Yang)
음/양은 사물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상대적으로 표현한다. 영춘권은 여성적인 관점을 통해 남성적인 에너지를 극복하려는 무술이다. 큰 힘으로 공격을 당할 때 그보다 더 큰 힘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유연한 힘으로 흘려내는 것이 영춘권의 방식이다. 영춘권은 이러한 음과 양의 맞물림과 그 상대적 변화를 파악하고, 그것을 몸과 마음으로 구현해 나아가는 무술이다.
9. 심리적 평정 (Silence is Gold)
고요한 물결에 작은 돌을 던지면 그 파문이 금방 드러나지만, 파도가 요동치는 수면에 떨어진 돌은 이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상태는 상대를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나의 의도를 상대에게 드러내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다. 영춘권은 부단한 훈련을 통해 스스로의 심리를 통제함으로써 감각의 미세한 변화까지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늘 고요한 몸과 마음은 영춘권의 수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조건인 것이다.
영춘권의 모든 습득 과정은 암기하는 것이 아니고 훈련 프로그램의 의식적인 수련과정을 통해 무의식까지 스스로 제어하려는 부단한 노력 속에 존재한다. 영춘권의 훈련 과정에 녹아들어 있는 이러한 이론들의 첫 출발점과 도착점은 오직 긴장을 풀고 부드러움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 그것에 달려 있다.
교본 ‘영춘권(도서출판인포더,2011년)’ 제2장 <영춘권의 이론>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