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작성자
나다움
작성일
2019-01-26 14:35
조회
14640
선생님, 잘 지내시죠? 한 번 찾아 뵙는다는 게 차일 피일 시간을 미루다 보니 또 한 해가 지났습니다. 나다움이라고 적으면 누군지 모르시려나요?
ㅎㅎㅎ
예전에 자유 게시판에 긴 글을 자주 올린 1인 입니다. 그게 벌써 10년이 되어가네요. 시간이 참 빨리도 갑니다. 이래도 모르신다면 ㅎㅎㅎ 제가 조만간에 찾아뵙든, 전화를 드리든 해야지요^^
오늘은 날이 조금 추워진 대신에 눈부시도록 화창한 날입니다.
건강하시고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https://blog.naver.com/nadaoom/221450724507

그제 어제 이상하게 잠을 개운하게 자지 못했다. 밤에 깊이 잠들지 못하고 괜스레 뒤척이기도 하고. 바로 누워도 돌아 누워도 무언가 불편한, 그런 밤을 보냈다. 아침에 알람소리를 듣기 전인가 알람을 끄고 다시 잠을 청한 무렵인가 문득 내 머리에 한 노래와 함께 물음이 살짝 떠올랐다 사라졌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어, 그런데 믿음과 사랑 사이에 소망이 왜 끼어있는 거지?
뮤즐리에 우유를 타서 먹는데 잠결에 잠깐 내 뇌리에 머물렀던 저 물음이 되살아났다. 이제는 알고 있지 않냐고, 어서 그 답을 말해보라고 나를 채근 하듯이.



1. 위화감? 위화감이었다.

살다보면 숱한 위화감을 느낀다.
별 생각없이 지나쳤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은
묘한 기쁨에 사로잡힌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교회를 갔다. 교회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왜 가야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가자고 하니 따라갔다. 따라나선 걸음을 시작으로 4~5년간 교회를 나갔다. 그 시절 나에게 교회는 초등학교 졸업 하고 무너진 동네 교제장의 이동에 지나지 않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동네에 내 또래는 하나 둘 이사를 가버려 나 말고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늘 동네 친구를 중심으로 학교 친구들과 어울렸던 내게 너무나 급작스런 변화였다. 중학교는 집에서 30분 정도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 거리에 있다. 중학교 친구들은 도시 전체에 흩어져 있었다. 그나마 대부분은 방과 후 학원을 다녔다. 방과 후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순간 부터 혼자만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늘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내가 중학교 들어가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진 까닭인지 교회 생활은 좋았다. 앞에서 설교하는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고, 믿음이라는 단어도 내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물론 때로는 고민하고 때로는 갈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부르짖기도 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화감 때문에 온전히 빠져들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5년간 교회 생활은 내게 소중한 기억이다. 노래도 못하고 악보도 볼 줄 모르면서 성가대에 앉아있던 기억도, 여름 캠프에서 열광적으로 게임에 빠져들던 추억도. 물론 고등학교 입학 후 더 강렬했던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눈부시도록 찬란한 기억들이 어느 정도 퇴색하여 '눈부시도록'은 빠진 찬란한 기억이 되긴 했지만.

이 때부터였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중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노래를 처음 들은 때부터였다. 믿음은 그렇다 치고, 사랑이야 당연히 으뜸이겠지, 그런데 소망은 왜 저 둘 사이에 놓여 있을까? 내게 자연스레 떠오른 위화감이자 물음이었다. 물어볼 정도로 궁금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그냥 뭔가 이상하다고 막연하게 두루뭉실 어렴풋이 부조화를 느낀 정도였다. 그 이후로도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된 다음에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중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를 듣게 되면 이유를 알 수 없는 까닭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물론 먼저 생각한 적은 없었다. 왜 위화감이 들었는지 따져보지도 않았다. 최초로 위화감을 가진 지 30년이나 지난 오늘 아침 침대에서 뒤척이는데 머리에 반짝 1번 떠올랐다 사라졌다. 아침으로 우유를 탄 뮤즐리를 숟가락으로 떠서 입 안에 떠 넣는 순간 마치 수수께끼가 풀린 것처럼 정리가 되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중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성경도 불경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맥스웰 몰츠 박사의 싸이코 싸이버네틱스를 통해서 성경과 불경을 대하는 태도가 바뀐 것은 분명하다. 물론 그 이전에 오쇼 라즈니쉬가 던져 놓은 실마리는 있었다. 나뭇잎 한 장에도 세상의 이치가 들어가 있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싸이코 싸이버네틱스에서 맥스웰 몰츠 박사는 사람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은 -모든 생물체는- 기계적인 부분Machine과 비기계적인 부분이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내 기억이 맞다면- 생명 유지를 위해서 기계적인 부분의 일부는 자동으로 작동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의도적으로 기계적인 부분을 조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단지 걷고 손으로 물건을 집는 것 이상을 조정할 수 있는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게 훌륭한 도구가 상상이라고 한다. 인간의 신경계는 상상과 실제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인가의 신경계가 상상과 실제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온다. 원효대사가 불경을 공부하러 멀리 길을 떠났다가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맛있게 마시고 난 다음 깨달은 사례도, 베르나르 베르베르 '개미'라는 소설 속에 나온 다양한 '심리 실험' 사례 들에서도. 최근 NLP 에서도 인간의 신경계는 상상과 실제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맥스웰 몰츠 박사의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하면 인간은 기계적인 요소가 있으나 이를 통제하고 조정할수 있는 비기계적인 요소가 있다. 인간은 그 정체성(자아상)의 범위 안에서 사고하고 행동하고 결과를 얻는다. 자아상은 바꿀 수 있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건 상상력이다. 이 다음이 중요하다. 바람직한 자아상을 가졌으나 그 앞에 나아갈 이정표나 목적지가 없다면?



2. 믿음과 소망과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뮤즐리를 입에 넣는 순간 내가 깨달은 건 소망이 믿음과 사랑 사이에 있는 이유였다. 소망은 길잡이가 되고 목적지가 된다. 이 때만 해도 왜 제일은 사랑인지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그냥 막연히 사랑이 으뜸이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내에게 소망이 왜 믿음과 사랑 사이에 있는지를 이야기 하다가 알게 되었다, 사랑이 왜 제일인지를.

성경에서는 계속해서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 해서 말하고 있다, 우주의 비밀에 대해서, 세상의 섭리에 대해서, 인간의 메커니즘에 대해서. 시대가 변해가면서 더 적절한 표현을 찾고 더 합당한 사례들로서 이해의 실마리를 끊임없이 주려고 했던 거겠지. 내가 좋아하는 훌륭한 툴, 맥스웰 몰츠 박사의 자아상이라는 툴을 대고 보면 분명해진다, 마치 암호 해독기로 암호를 풀어내는 것처럼.

사랑은 자아상의 모델이다.
맥스웰 몰츠 박사의 책을 보면서 어려웠던 것 가운데 하나가 바람직한 자아상의 모델을 찾는 것이었다. 사람이 의식하지 못하고 내리는 숱한 판단들로 인해서 모든 행위의 결과들은 자아상으로 귀결한다. 성공하는 자아상이라면 성공으로, 실패하는 자아상이라면 실패로. 몇번 긍정적인 성공적인 생각과 판단을 했다고 해도 의식하지 못한 수많은 판단을 자아상에 부합하게 내리게 됨으로써 이를 피할 수가 없다. 결과를 바꾸고 싶으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자아상부터 바꿔야 한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다. 그럼 어떤 자아상이 바람직하고 성공하는 자아상인가? 여기에 대한 성공적인 자아상이 무언인가에 대한 대답이 '사랑'이다. 성경에서는 일찌기 이 답을 주려고 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 자신을 닮은 아이를 낳듯이. 결국, 사랑은 자아상의 바람직한 모델이자 '하나님' 그 자체를 상징하고 있는 게 아닐까?

믿음은 무엇일까?
맥스웰 몰츠 박사는 자아상을 바꾸는 방법은 '원하는 자아상이 바로 자신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다. 이를 위한 유용하고 효과적인 도구로써 '상상'을 제시한다. 사교적인 사람이기를 바란다면 자신이 사교적이기를 받아들이면 되는데, 말처럼 '나는 사교적이다'라고 쉽게 받아 들여진다면, 믿을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이때 상상력을 이용해서 '사교적인 나'를 상상하는 것이다. 가능한 한 세세하고 구체적으로 반복해서. 온 신경이, 나의 무의식 마저 거부감없이 사실로 받아들일 만큼 생생하게 계속 상상을 하게되면서-미치는 것도 같은 메커니즘으로 해석이 ㅡ.ㅡ;;- 거부감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무너지고 장애가 눈 녹듯 사라짐에 따라 자아상이 바뀌어 간다. 즉, 믿음은 '상상'의 다른 표현으로 '사랑'이라는 자아상을 형성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소망은 원동력이자 지향점이자 목표가 된다.
바람직한 자아상이 갖춰지기 전에는 바람직한 자아상을 갖는 것이 소망이 되어 내가 '사랑'이 될 때까지 믿고 실패해도 다시 믿고 힘들어도 계속 믿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바람직한 자아상을 가지게 된 다음에는? 나를 사랑하는 자아상을 가진 것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기를 바란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하다. 원초적으로 엄마와 아빠가 있었기에 내가 있다. 그들에게 내가 선물이 아니라 내가 그들로부터 이 삶을 선물 받았다. 혼자로도 온전하지만 거기에는 내일이 없지 않을까? 물론 이 내일 마저도 부질 없는 덧 없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때때로 혼자 있는 순간이 간절한 만큼 때때로 우리로 어울리는 순간 또한 간절한 게 아닐까? 사랑으로 가득한 나라는 소망을 이룬 다음에는 이웃을 나처럼 사랑하는 소망이 나를 참으로 살게 하는 촉매제가 되지 않을까? 방향을 상실한 배가 망망 대해 위에서 정처없이 파도에 바람에 휩쓸려 떠도는 게 아니라 바람직한 자아상 '사랑'을 바탕으로 '사랑'을 베푸는 길로 이끄는 목적지, 길잡이가 되는 것, 이것이 소망이지 않을까? 이것이 믿음과 사랑과 함께 소망이 있는 이유가 아닐까?


3.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즉 여기서 '제일'의 의미는 순서 상 첫 번째를 말하는 것이지 비교의 의미로 뛰어 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일체 하나님을 말하듯 믿음 소망 사랑 이 3개가 하나로 일체가 되어야 의미를 가지며, 그 시작이 사랑이라는 의미로 풀어야 하지 않을까?

성경에서 계속해서 말하는 삶의 진리는 '사랑'으로 가득 찬-하나님의 형상- 나를 '믿음'으로 세우고 '사랑'으로 가득 찬 세계를 만드는 '소망'을 세우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이루어주신다'이다. 마치 믿으면 왜 그렇게 되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사랑'이 되고-자아상을 먼저 바로 세우고- 이후에 '소망'을 세우면 그 구체적인 길은 몰라도 중간에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아도 '소망'을 놓지 않고 '믿음'으로 붙들고 있으면 마침내 '소망'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자 빛이 생긴 것처럼,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면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희망 고문?
몰라서 하는 소리다
희망은 고문이 아니다.
희망은 이루어 진다,
단지 조건이 충족이 될 때.
스스로가 그럴 자격이 있다고 받아들일 때
그 때
비로소 나를 둘러 싼 세계가
나의 희망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치 가난하고 힘든 살이에 지친 래퍼가
상상으로 만든 허세가 랩이 되고
숨쉬는 것도 힘든 살이를 살아 내기 위해
목숨 바쳐 내뱉는 랩이 기도가 되고
계속 읊조리는 랩으로 허세를 진짜로 받아들일 때
그 때
기도는 응답을 하여 희망이 된다.
나의 희망은 내가 자격이 있다고 받아들일 때
바로 이 때 부터다.

Fatal error: Uncaught Error: Call to undefined method KBUrl::setBoard() in /home1/people99/public_html/wp-content/plugins/kboard-comments/class/KBCommentsBuilder.class.php:47 Stack trace: #0 /home1/people99/public_html/wp-content/plugins/kboard-comments/index.php(142): KBCommentsBuilder->create() #1 /home1/people99/public_html/wp-content/plugins/kboard/class/KBoard.class.php(160): kboard_comments_builder(Array) #2 /home1/people99/public_html/wp-content/plugins/kboard/skin/customer/document.php(68): KBoard->buildComment('5204') #3 /home1/people99/public_html/wp-content/plugins/kboard/class/KBoardSkin.class.php(70): include('/home1/people99...') #4 /home1/people99/public_html/wp-content/plugins/kboard/class/KBoardBuilder.class.php(336): KBoardSkin->load('customer', 'document.php', Array) #5 /home1/people99/public_html/wp-content/plugins/kboard/class/KBoardBuilder.class.php(188): KBoardBuilder->builderDocument() #6 /home1/people99/public_html/wp-content/plugins/kboard/index.php(423): KBoardBuilder->create() #7 /home1/people9 in /home1/people99/public_html/wp-content/plugins/kboard-comments/class/KBCommentsBuilder.class.php on line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