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가는 아들과 아이로 머물러 있는 아버지

작성자
나다움
작성일
2019-08-11 02:46
조회
15740
어른이 되어가는 아들과 아이로 머물러 있는 아버지




1. 호사다마 : 좋은 일에는 많은 마가 낀다.

부모님이 계신 창녕으로 가려했더니 태풍이 온다기에 1주일 늦췄다. 미국 일본 한국의 예보가 다 달랐다. 미국과 일본은 태풍이 한반도 중심을 가로질러 갈 것으로 예측했다. 많은 비를 머금은 태풍이 특히 한반도를 가로질러 가면 편서풍의 영향으로 인해서 태풍의 서쪽 지역은 대체로 피해가 더 크다고 한다. 토요일 아침부터 태풍영향권에 들어서 일요일 오전까지 영향권에 있을 거 같다는 예보에 부모님 찾아 뵙는 걸 미뤘다. 온다는 태풍은 세력이 약해지더니 육상에 상륙하고는 얼마 안되어 소멸해버렸다.

한 주가 흘러 다시 부모님을 뵈러 가려고 하니까 이번에는 장마가, 마른 장마가 한동안 이어지더니 마지막 장마가 목요일 저녁부터 주말까지 이어진댄다. 일정을 더 미룰 수가 없다. 가야한다. 아내와 나는 쉬엄쉬엄 운전해서 가기로 하고 비오는 날 아침 차를 창녕으로 향했다. 문득, 정말 문득 드는 생각이 하나, 우리가 창녕에 내려가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이길래 이렇게 자꾸 발목을 붙잡으려는 기상 이변이 나타나는 걸까? 아내와 내가 결혼 승낙 받기 위해서 인사 드리러 갈때도 앞이 보이지 않는 빗 속을 뚫고 갔다.

결론은 좋은 일이 있었다. 몇년씩 공부해도 1번에 합격하기 어렵다는 진급(?) 시험을 얼마 전에 아내가 한 번에 붙었다. 이 소식은 전화로 부모님께 전했지만 그래도 좋은 소식이라 얼굴을 직접 보고 전하고자 했던 건데, 자꾸 내려 가기 힘들게 날씨가 변덕을 부린다. 좋은 곳으로 발령이 나려고 이러나? 생각해보면 아내의 발령과 우리가 창녕으로 가는 건 딱히 연관성이 없다.

그랬다, 이번에 날씨가 계속해서 훼방을 놓은 건 아내가 아니라 나에게 좋은 일이 있으려고 그랬다. 이번에 내려 가서 나는 아버지와 싸웠다. 아니 싸웠다기 보다 내가 일방적으로 목소리를 높히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발광하듯이 감정을 토해냈다. 한바탕 폭풍이 불고 지나가고 난 다음, 난 내가 붙들고 있던 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2. 모른다, 안타깝게도, 가엽게도, 불쌍하게도.

우리 부모님, 특히 우리 아버지는 말을 못한다. 아, 오해가 있겠다. 말은 잘 하는데 표현에 서투르다고 해야할까. 자식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표현하는데 늘 걱정이 앞서고, 칭찬보다 당부가 앞서고, 인정보다 아쉬움이 앞선다. 어릴 때는 맞기도 많이 맞았다. 나도 나지만 형이나 누나가 맞는 것도 많이 보았다. 아마 지금이라면 가정폭력으로 잡혀가고도 남았을 정도로 심했다. 때로는 왜 맞는지 모르고 맞았다. 그래서 더 억울하고 원통하고. 하지만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는 아버지가 방에 들어오면 무서워서 떨었다. 딱히 뭔가 잘못한 게 없는데도 말이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신뢰 대신에 두려움과 원망만이 쌓여 갔다.

어머니는 내게 그랬다, 나는 늘 어른스러웠고 야단칠 데가 없었다고. 아이가 아이처럼 굴지 못하고 어른처럼 행동할 수 밖에 없었던 것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도 가끔 표현하신다.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없었다. 흥분한 아버지는 누구도 말릴 수 없었고, 흥분이 가신 뒤에도 아버지는 당신이 한 행동이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3. 무너지다.

시간이 흘러 나는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게 되면서 집을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곪은 상처는 이 때부터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부당한 것에 공정하지 못한 처우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나는 조금씩 세상에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대학 과 선배하고 삐걱댄 이후에 학교를 다니기 싫어졌다. 부모님과 상의없이 입영신청서를 내고 영장이 나온 다음에 부모님에게 알렸다. 상의 없이 일을 진행했다고 나무라시는 아버지에게 대들 듯이 소리지르고는 그대로 자취방이 있던 의정부로 올라갔다. 입영을 할 때까지 부모님과 연락을 안했던 거 같다. 군대에서도 참 부당한 일이 많았다. 선임과 심지어 지휘관하고도 삐걱되었다. 군대 제대하고도 나는 갈피를 잡지 못 했다. 학교를 휴학했다 복학했다를 반복하다 끝내는 그만 두었다. 당시 비정규직으로 한 회사에서 4년을 근무하고 퇴사한다. 그 이후로 일을 쉬지는 않았는데 1년 이상 일을 하지 못했다. 학원 강사도 하고 대형 쇼핑 몰에서 물건을 팔기도 하고 유명한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부띠끄의 자재과에서 원단 나르고 자르는 일을 하기도 하고. 2018년 금융위기가 터지자 나는 부띠끄에서 일하는 것도 그만 두었다. 부띠끄 내 불합리한 모습에 누적된 화가 감당이 안되기도 했고 IMF를 군대에서 보낸 탓에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경제위기라는 금융위기 당시의 분위기를 이번에는 제대로 느끼고 싶었다. 몇년 전부터 꾸준히 적은 소득의 일부를 주식에 투자해 왔으니까. 2008년과 2009년은 남들 눈에 일을 하지 않고 보냈다. 내가 샀던 주식은 2009년 초에 -70% 까지 떨어졌다가 그 해 말에 +17%까지 상승을 했다. 코스톨라니가 말한 진정한 공황을 눈으로 보고 느꼈다. 정말 이 당시에는 몇 달 동안 일말의 긍정도 찾을 수 없는 비관적인 뉴스로만 가득했고, 나 역시도 이 때는 하루 하루 견뎌내는 것이 전부였다. 이즈음에 난생 처음 사귀었던 여자 친구와 3년 만에 헤어졌다.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거의 무너지다 시피했다.



4. 기적의 시작

지금 생각해보면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초등학교 동창에게, 심리 상담을 직업으로 하고 있는 동창에게 이메일이 왔다. 몇년 만인지 모르겠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전학을 가면서 이 친구를 처음 만났다. 초등학교 졸업 하고 몇년 있다가 편지 주고 받기를 한 동안. 연락이 끊어졌다가 군대 제대하고 복학하기 전에 우연히 연락이 닿아 고향에 머무르면서 잠깐 소식을 주고 받고. 몇 년 뒤에 서울에서 이메일을 몇 차례 주고 받고 전화 통화 좀 나누다 또 소원해지고. 이후 몇 년 동안 연락이 없다가 메일이 온 거다. 만나니 반갑다.

이 친구와 나는 공유한 것이 많이 없다. 초등학교 같은 반이었지만 짝꿍을 한 적도 없고 같이 어울려 논 적도 거의 없다. 중고등학교 때 편지를 주고 받고 가끔 전화 통화를 했지만 만난 적은 없다. 군대 제대하고 한 두번 만나서 식사를 같이 하긴 했다. 이 친구가 심리 상담 대학원을 서울에 있는 학교로 오게 되면서 서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만나지는 않았다. 만나고 싶었는데 만나지지가 않았다.

이메일을 주고 받고 만나기로 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건 몇 년 만이고 만나는 건 몇 년 만인지. 그 동안 친구는 결혼을 했고 심리 상담 공부를 마치고 심리 상담을 업으로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섰는데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내가 불안해 보인다고. 심리 상담이 직업인지라 만난 짧은 시간동안 나의 불안한 심리가 보였나 보다.

이 친구를 통해서 나는 심리 상담을 시작했다. 일반 심리 상담과는 다른 것이 만나지는 않았다. 친구가 이메일로 심리상담 설문을 보내오면 내가 체크해서 메일로 보내고. 친구가 책을 읽어보라고 하면 책을 읽고 내가 메일을 보내면 친구가 화두를 던져주는 식이었다. 이러는 동안에 나는 조금씩 회복을 했고 영춘권이라는 운동을 배우면서 사람들과도 조금씩 어울리기 시작했다.



5. 기적, 이어지다.

이러던 중에 내 인생에 가장 큰 기적이자 복을 만나게 된다, 바로 지금의 아내다. 2010년 결혼하고 벌써 9년이 지났다. 이 무렵 고마운 이 친구와는 또 다시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다. 자연스레? 이 친구와 나의 관계를 돌아보면 자연스럽다.

아내와 결혼 생활을 통해서 나는 성장에 가속이 붙는다. 나는 내가 받고 싶었던 것을 아내에게 해주었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들을. 아내에게 매사에 잘했다 잘했다, 괜찮다 말해주었다. 이러는 동안 나는 참았다. 아내를 향한 이런저런 불만들을 하나 둘 쌓아갔다. 물론 참는게 좋은 게 아니라는 건 안다. 다만 지금의 아내에게는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인정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을 했다. 나도 아내도 힘들게 살아왔던 것이다, 내 편 하나 없는 세상을 말이다. 하지만 아내에게 말은 했다, 내가 언제까지 지금처럼 받아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다행히도 아내는 변해갔다, 성장해갔다. 기본적으로 매사에 아내를 인정하고 칭찬한다는 기조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나 역시 많이 부족하고 불안정한 상태였기에 참기만 하는 것에는 이내 한계에 도달했다. 하나 둘 아내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힘들었다, 아내도 나도. 둘 다 서투른 까닭이다. 나도 표현하는 법을 잘 모르기도 하고, 내가 무엇을 불만스러워하는지 스스르도 명확히 알지 못하는 막연한 경우도 많았고. 괜찮아 괜찮아 잘했어 잘했어 매번 이렇게 말해주던 내가 아니라고 말을 하기 시작하니 아내도 당황스러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솔직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아내의 잘못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불편하게 느끼는 부분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것이라고.

아내와 나는 상처가 많았다. 이 상처의 대부분은 가정에서 받은 상처였다. 나도 아내도 부모님이 계신 집이, 가족이 편하지가 않았다. 아내와 나의 자존감은 철이 없던 시절부터 가족을 통해서 많이 무너져 있었다. 낮은 자존감 탓일까? 이 당시에는 나무라고 탓하려고 하는 말이 아닌데도 공격하고 비난한다고 받아들이면서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다행히 내가 아내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을 때쯤 아내는 그 동안 내가 수용하고 인정해준 덕분에 자존감이 꽤 회복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이내 내가 하는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면서 언젠가부터 내가 아내에게 했던 대로 아내가 나에게 하기 시작했다. 내가 무엇을 하든 잘했다 잘했다 괜찮다 괜찮다 인정해주고 격려해주고. 이를 통해서 아내와 나는 회복하고 성장해갔다.



6. 나를 이해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이해가 생기다.

아내와 결혼 생활을 통해서 큰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인정해주고 칭찬해주는 것이 먼저구나라는 걸, 따지고 고치려 드는 대신에 말이다. 이때쯤에 아버지에 대한 감정도 조금씩 풀리면서 아버지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생겨났다. 아버지는, 어머니는 치열하게 살아내셨다. 삶에 여유는 없었다, 아끼고 아끼고 아껴야만 3남매를 학교라도 보낼 수 있었다. 옷을 물려 입는 건 당연했고 나는 옷 사달라고 해본 적도 없다. 심지어 초등학교 1학년 때 미술 시간에 내가 꺼낸 종이 곽에 든 8색 크레스파스는 교실에 붙여놓은 북한 현실과 남한 현실을 비교한 포스터에 나왔던 북한 초등학생이 쓴다는 크레파스 보다 못한 거였다. 다들 비닐과 플라스틱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케이스에 금색, 은색까지 있는 다양한 색깔로 가득한 크레파스를 들고 다녔다. 살색도 없어서 사람을 그릴 때는 친구에게 아쉬운 소리를 들어가면서 빌려야만 했다.

부모님 세대에는 알 수도 없고 알 수 있는 여유도 허락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아버지는 당신이 하는 행동이 어떤 의미로 전달되는지 전혀 몰랐다. 자식에게 당신이 했던 말이 상처가 된다는 것을, 자식이 이뤄낸 작은 성취 성취들을 의미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을 몰랐다. 당신은 그저 걱정이 되었고, 염려가 되었고, 더 잘하기를 바랐을 뿐이다. 기특한 마음과 자랑스런 마음을 표현하는 대신에 걱정을, 염려를, 바람을 표현했을 뿐이다.

대학에 들어 가고서도, 성인이 되고서도 나는 아버지의 칭찬 대신에 꺼내는 걱정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막연히 짜증이 나고 화가 났을 뿐. 영문을 모른 채 나는 아버지가 나를 생각하고 걱정해서 하는 말들에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이는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받은 상처 때문이었으리라. 지나칠 만큼의 근면과 성실함으로 꽤 많은 자산을 일구었으나 자식을 키우는 법을 몰랐던 할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버지였다. 세배돈으로 늘 100원을 주시던 할아버지는 큰 아들은 대학까지 보냈지만 나머지 자식은 교육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보통 옛날 사람이었다. 아버지 당신도 당신의 아버지에게서 상처를 받는 줄 모르고 상처를 받았고 가정에서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세상으로 나왔을 테다, 어찌보면 내쳐지듯이 말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3 아이의 아빠가,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는데 기댈 데도, 손 벌릴 데도 없는 당신은 어려운 그 시대를 치열하게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 만이 할 수 있는 전부였을 테지. 마음의 상처, 공황 장애, 우울증....., 이런 외계어를 접하는 것 마저 사치스러운 시대를 살아낸 것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7. 내가 아버지를 인정하고 격려하자.

해결법은? 글쎄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내가 아내에게 해주고 아내가 나에게 해준 것처럼 인정하고 격려해주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을 했다.

우리 아버지는 걱정이 너무 많다. 기본적으로 우리 집 안은 머리가 좋다. 이 좋은 머리를 곪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가 아는 길이 아닌 다른 길에 대해서 뭔가 해보겠노라고 말을 하면 끊임없이 걱정을 늘어놓으신다. 좋은 머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걱정을 떠 올리는 건데. 유년시절 가정에서도 안정을 누리지 못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힘든 시기를 보냈고, 박봉이지만 안정된 직장을 가졌을 때는 베트남 파병 까지 다녀 왔음에도 불구하고 뒤늦게 군복무를 안했다고 몇 년을 붙들려 가셨다. 정권이 바뀌고 나서 청와대에 편지를 쓴 뒤에야 잡으러 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소설과 영화를 통해서 알게 된 어두운 시절 당신은 얼마나 불안했을까? 아버지 생에 안정은 없었다. 이러다보니 아버지의 불안은 자연스레 자식들에게 향하고 잘 한 것에 대한 칭찬 보다 잘 못 될 것에 대한 걱정이 앞서는 거다. 물론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난 이것 보다는 정서적 안정을 누리지 못한 삶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을 한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 던가? 가정 교육은 딴 게 아니다, 부모가 평소에 하는 말과 행동이 가정 교육이 아닐까? 나도 모르는 새 아버지 이상으로 걱정을 하고 있는 나를 깨닫고는 깜짝 놀랐다.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나를 처음 자각했을 때의 놀라움이란. 쉽지는 않았지만 걱정을 위한 걱정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 걱정은 나를 공황 수준으로까지 이끌곤 하니까. 아마도 아버지도 공황수준까지 가지 않았을까? 아버지도 할아버지에게 상처를 받고 막막한 현실을 살아내기 위해서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 게 아닐까?

나는 아버지가 무엇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칭찬하고 긍정하자고 했다. 아침 저녁으로 산책을 한다고 하면 잘하셨네요. 밭을 일군다고 하면 잘하셨네요. 핸드폰을 바꿨다고 하면 잘하셨네요. 잘하셨네요. 나도 아직 이런 트레이닝이 부족하다보니 가끔은 아버지처럼 '그런데'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확실히 많이 줄어들었다. 아내가 성장한 것처럼 내가 성장한 것처럼 아버지도 성장하지 않을까? 여전히 불안한 아버지 마음에 안정이 찾아오면, 부정이 아니라 긍정하는 말을 많이 듣다보면 아버지가 하는 말에도 긍정하는 말이 많아지지 않을까? 이런 바람과 기대를 갖고 있다.



8. 아직 각오가 필요하다, 부모님을 만나는 데.

이번에도 부모님 뵈러 가면서 각오를 다지고 간다. 칭찬하고 인정하고 긍정해드리자. 아직까지 나는 부모님을 만나는 게 마냥 편하지가 않다. 결혼전에는 1년에 한 두차례 전화 통화를 했다. 만난 게 아니라 전화 통화 말이다. 만나지는 않았다. 결혼하고는 1년에 2~3차례 내려가기는 하지만 새벽에 4~5시간 운전하고 내려가서 점심 먹고 4~5시간 운전해서 그 날 바로 올라오기도 했다. 부모님 댁에서 1박을 하기 시작한 것은 몇년 되지 않는다. 불편하다. 늘 조마조마 하다. 아버지가 예측이 안되고 나 자신도 예측이 되지를 않아서. 답을 알았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그 때부터 시작이다, 특히 이런 문제는 더더욱. 나에게는 아버지가 하는 말을 공격으로, 나를 무시하는 말이 아니라고 받아들이는 훈련이 필요하다. 아버지를 뒤늦게 이해하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자각없는 폭력에 20년 이상 노출되어 살아온 내게는 훈련이 필요하다. 내가 컨디션이 좋을 때는 괜찮지만 몸과 마음 둘 중 하나라도 지쳐있는 상태라면 나 역시 깨어있지 못한 상태에서 피상적인 반응을 할 가능성이 너무나 큰 까닭이다.

이번에는 아버지와 다툼의 실마리를 만들지 않으려고 내려가면 가능한 한 뉴스는 외면하기로 마음에 단단히 새겼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이야기는 전개가 되었다. 아버지는 밭일을 하고 인터넷으로 바둑을 두고 낙동강변 산책을 하는 걸로 시간을 보낸다. 아, 최근에는 유튜브로 노래를 열심히 배우고 따라 부른다고. 사람을 거의 만나질 않는다. 아들을 보니 이야기가 하고 싶은가 보다.

이번에 땅을 하나 샀다
잘하셨네요.

여기 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이 다음이 문제였다. 땅을 사게 된 이유를 말씀하시는데 한 유투버가 이번 정부에서 몰래 예고도 없이 화폐개혁을 할 거라는 이야기에 불안해졌다고. 화폐개혁....., 세상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허영만의 만화 타짜나 조정래의 소설 '한강'을 보면 화폐개혁이 어떤 의미인지를 조금 짐작할 수 있다. -화폐개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에- 아버지가 기억하는 화폐개혁은 한마디로 은행에 넣어 둔 돈이 증발하는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현 정부에 대한 이런 저런 불만을 늘어놓는다. 나는 듣다 듣다 버럭 화를 냈다. 사람들에게 공포를 불어넣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유투버에게 화가 났다. 대게는 뉴스를 보다가 아버지는 유투브를 통해서 알게된 거짓뉴스로 현정부를 비난 하고, 난 나름 사실관계를 짚어 주려고 하고, 아버지는 부정하고 ... 이런 과정을 몇번 거치다 나는 참지 못하고 화를 낸다. 이번에는 시작은 달랐지만 또 이렇게 진행이 되었다. 다른 때와 달리 더 깊이 수차례 더 진행이 되었다.

화가 난다, 공포를 수단으로 활용하는 모든 존재가.

작년인가 제작년인가 뉴스를 보는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가 화를 내기 시작한 것이. 구체적인 이유는 모르겠는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필요한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이래도 힘들다. 아버지와 이러고 나면 사람 대하기가 어려워진다. 한 반년 잘 추스린 다음 내려가서 또 한 바탕 하고 올라와 또 반년을 추스리고 내려가서 또 한 바탕 하고. 이번에는 이르지 않으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아직은 부족했나 보다. 이번에는 1차 2차 3차 까지 했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아버지에게 소리를 지른 것이 미안하고, 사람대하는 것이 또 어려워졌다. 하지만 나는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을 알게된 계기였기에 만족한다.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자유로워지는 방법도 찾을 것이기에.



9. 싸운다, 잘 싸운다.

아내는 다르게 표현을 하지만 나는 부부 싸움을 참 많이 했다고, 부부 싸움을 잘 했다고 곧잘 말한다. 부부 싸움을 통해서 나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고 아내를 더 잘 알게 되었고 아내와 나의 서로에 대한 믿음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아마 이 때문일까? 제 작년 부터인가? 뉴스를 보다가 나는 아버지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한 동안 나는 마음이 힘든 시간을 보내기는 한다. 작년에도 그랬고. 이 때문에 내려가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아버지를 인정하고 긍정하고 칭찬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내가 수긍하는 범위 내에서 인정하고 긍정하고 칭찬하고 있었음을, 결국은 아버지가 내게 한 것 보다 조금 더 나아갔을 뿐이라는 것을.

멋 모르고 할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추스릴 새도 없이 가족을 꾸리고 살아가느라 바빴던 아버지는 당신이 상처를 갖고 있는지 헤아려볼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 세대에게 마음의 상처라는 개념 자체가 있었을까? 상황이 이러니 상처는 더더욱 안으로 곪아가지 않았을까. 물론 아버지의 행동이 옳았다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행했던 폭력이 틀린 것은, 잘못된 것은 분명하다, 다만 다만..... 당신의 의지로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라는 점이다. 요즘 잊을 만 하면 터져 나오는 조현병을 가진 사람들이 벌인 끔찍한 사건 사고들. 그들이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에게 치료와 보살핌이 필요한 것 또한 사실이다.

왜 나는 다른 것은 다 인정하고 긍정하려고 하면서 거짓 뉴스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사람들에 동조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용납을 하지 못하는가? 무엇이 달라서? 결국은 아버지가 내게 하는 것과 다르 것이 없지 않나? 결국은 나 또한 내가 이해하는 것에 한해서만 긍정하고 인정한 것이지 않나? 물론 이유가 없지는 않았다. 거짓 뉴스로 사람의 불안감을 자극하고 공포감을 극대화시켜 의도한 바를 이루려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치민 것은 사실이다. 안그래도 할아버지의 가정에서 안정을 누리지 못했던 아버지가, 기댈 곳이 전혀 없었던 아버지가 걱정에 걱정을 거듭하는 와중에 형편이 좀 나아졌는데 이 마저도 거짓으로 불안하게 만드려는 사람들에 대해서 화가 폭발하듯 치솟았다. 하지만 이는 내가 다양한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아닌가?

2번이나 날씨가 내 발목을 붙잡으려고 했다. 아마도 나와 아버지가 또 한바탕 할 것을 알았기 때문일테지. 그래도 와야 했다. 나와 아버지는 서로 목소리를 높이고 싸워야 했다. 내가 여전히 편향적인 사고에 갇혀서 아버지를 평가하고 있었음을 깨닫기 위해서 말이다. 아내와 싸움을 통해서 내가 화가 난 진짜 이유를 찾았던 것처럼 아버지와의 이번 싸움을 통해서도 난 찾았다. 가짜 뉴스를 떠나서 아버지와 나의 정치적인 견해가 다른 부분을 떠나서 나는 있는 그대로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 기준에 들어왔을 때만 아버지를 인정하고 있었음을.


상처는 사람의 성장을 지연시키고 멈추게 한다,
그 상처가 아물 때까지.
아물지 않은 상처 속에서 아버지는 자식을 키웠고,
아버지가 시켜 준 교육 때문에
아들은 불혹을 즈음해서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늦긴 했지만 다행히도.
어른이 되어가자 어린 아버지가 보인다,
사랑이 필요한,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품어줘야하는
어린 아버지가 보인다.




Fatal error: Uncaught Error: Call to undefined method KBUrl::setBoard() in /home1/people99/public_html/wp-content/plugins/kboard-comments/class/KBCommentsBuilder.class.php:47 Stack trace: #0 /home1/people99/public_html/wp-content/plugins/kboard-comments/index.php(142): KBCommentsBuilder->create() #1 /home1/people99/public_html/wp-content/plugins/kboard/class/KBoard.class.php(160): kboard_comments_builder(Array) #2 /home1/people99/public_html/wp-content/plugins/kboard/skin/customer/document.php(68): KBoard->buildComment('5215') #3 /home1/people99/public_html/wp-content/plugins/kboard/class/KBoardSkin.class.php(70): include('/home1/people99...') #4 /home1/people99/public_html/wp-content/plugins/kboard/class/KBoardBuilder.class.php(336): KBoardSkin->load('customer', 'document.php', Array) #5 /home1/people99/public_html/wp-content/plugins/kboard/class/KBoardBuilder.class.php(188): KBoardBuilder->builderDocument() #6 /home1/people99/public_html/wp-content/plugins/kboard/index.php(423): KBoardBuilder->create() #7 /home1/people9 in /home1/people99/public_html/wp-content/plugins/kboard-comments/class/KBCommentsBuilder.class.php on line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