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영춘권의 유래 중 엽문葉問선생이 전하신 說이 가장 일반적이다.
중국 명나라 말엽 소림사는 반란의 지지로 수차례나 청나라 군사의 압박을 받았다. 소림사 내부의 한 중의 배신으로 화염에 휩싸인 절에 청나라 군사가 쳐들어와 많은 중들이 죽거나 탈출하게 되었다.
오매선사는 후난마을 근처로 피신한 후 근처 어느 절에 체류 중 친분있는 두부장사 엄이嚴二와 그의 딸 엄영춘嚴詠春을 만났다. 엄영춘은 그 고을에서 아름다움과 품위를 두루 갖춘 여성으로 소문나 있었는데 어느 날 영춘이 울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그 연유를 알아본즉 고을의 포악한 불량배가 영춘에게 아내가 되기를 강요하며 괴롭히고 있다는 것이었다.
얼마 후 불량배가 찾아와 영춘에게 자신의 아내가 되라며 횡포를 부렸는데 오매선사는 신묘한 무술로 그를 물리치고 돌려보내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오매선사는 영춘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도록 소림의 권법을 전수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불과 얼마 후면 불량배는 다시 찾아올 것이고, 이러한 시간적인 제약 때문에 영춘에게 복잡한 기술을 가르칠 여유가 없었다.
오매선사는 자신이 연마한 무술의 정수를 재구성하여 직선적이고 단순하며 동시에 효율적인 방어/공격이 가능한 권법을 영춘에게 가르치게 된다. 엄영춘은 밤낮으로 열심히 연마했고 결국 그 불량배와의 싸움에서 이기게 된다. 그 후 불량배는 그 고을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다.
그 후 영춘은 1800년 즈음에 양박주梁博籌와 결혼했는데 그는 이미 다른 류 무술의 고수였으나 아내 영춘의 깊이 있는 기술에 매료되어 그 권법을 전수 받는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엄영춘과 양박주가 장인 엄이嚴二가 타계할 때 까지 가르침을 받았는데 장인이 죽은 후에는 아내 영춘으로부터 나머지 권법을 전수받았다는 이설도 있다.
어찌되었든 분명한 것은 당시 영춘권이 복건성에서 시작되어 남편 양박주에 의해 점차 퍼져 나갔고, 그의 제자 중 황화보黃華寶와 양이제梁二娣가 광동성 불산에 옮겨 제자를 양성했으며 그를 기반으로 불산파 영춘권이 태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황화보와 양이제의 제자인 양찬梁贊(1826~1901)은 유명한 한의사였으며 1826년에 태어나 24세 때부터 영춘권을 익혀 당대 19세기 최고의 고수라 일컬어졌다. 그러나 그는 그가 배운 무술을 사람들 앞에 거의 드러내지 않았고 일생에 걸쳐서 4명의 제자를 두었는데 그중에 2명은 그의 아들이었다. 그의 제자들 중 진화순陳華順을 시작으로 최초의 반공개적인 교습의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이 당시 영춘권을 배우는 대가는 매우 비싸서 황금을 싸들고 사부를 찾아야만 배울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진전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양찬梁贊은 수많은 도전을 받았는데 한번도 패한적이 없어 당시 영춘권왕詠春拳王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그의 일대기를 그린 중국 영화가 만들어 질 정도였다. 그가 타계할 당시 나이는 76세 였다.
두 아들들과 제자 중 진화순陳華順(1849~1913)은 스승의 업적을 이어 1877년 쯤에 소수의 제자를 받았다. 그 중 오늘날 영춘권을 세계에 널리 알리게 되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엽문葉問(1893~1972) 선생이다. 엽문선생은 1893년에 태어나 1906년에 진화순선생에 의해 영춘권을 접하게 되는데 스승이 은퇴 할 때까지 한시도 연마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스승 진화순이 타계한 후 엽문은 홍콩에 있는 스테픈 대학(ST.Stephans college)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양찬의 아들 양벽梁劈과 사형 오중소吳仲素를 만나게 되어 그들로부터 더욱 깊이 있는 영춘권을 터득하게 된다. 1949년 공산혁명이 중국본토에서 마카오까지 빠른 속도로 퍼지는 동안 이듬해인 1950년에 홍콩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곳이 오늘날 영춘권의 본거지가 된다.
많은 엽문선생의 제자 중 특히 이소룡Bruce Lee를 통해 영춘권은 빠른 속도로 서방 지역으로 펴져 나갔다. 그가 창시한 차단의 길, 절권도도 영춘권의 기본인 중심선과 각도의 이론에서 유래되었다.
영춘권은 중국무술의 역사상 최초로 여성에 의해 창시된 과학적이며 실전적인 권법인 것이다.